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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고교시절 5.18 체험이 학생운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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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61회 작성일20-01-3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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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인성고등학교 2학년 때 5.18을 겪었다. 내가 직접 시위하고 두들겨 맞은 것은 아니었다.

친구가 구속되고, 무참하게 구타당하는 모습을 봤다. 광주 산수동에서 자취했는데 난리가 났다고 했다.

양동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해서 나주로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도청 앞 광장을 가보았다.

계엄군에 쫒기는 시민들과 시위대의 모습을 봤다. 계엄군의 진주 모습도 봤다. 가슴속에 분노가 일었다. 

고향에서 일어난 5.18은 언젠가는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문화원 싸움은 그런 광주학살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고대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면서 고려대 정경대 학회 활동을 했다.

처음에 아버지는 법대, 상대를 가라고 하셨고, 나는 정외과를 가겠다고 했다.

아마 그때도 어느 정도 사회적 의식은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와 의견충돌을 빚다가 "취직 잘된다니까 그럼 신방과 갈게요"그랬다.

그 무렵은 신방과가 인기가 좋을 때였다. 당시는 고대에서 신방과가 법대보다 커트라인이 높았다.

 

시골출신인 나는 자취생이었다. 제기동과 이문동에서 자취했다. 삼민투 의장으로 일하게 되는 허인회랑 같이 살았다.

아마도 같이 1년 이상 자취를 한 것 같다. 같은 학과는 아니었지만 둘은 이른바 고대 운동권 비밀소조였다.

허인회는 '삼민투' 위원장을 맡았는데 나 역시 비공식적으로는 삼민투 조직원이었다.

그래서 삼민투가 미문화원 점거투쟁에 나설 때 나도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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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학생으로서 지식인은 당대의 사회적 사명을 다하는 것이 본질적 과제였다.

침묵하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침묵하는 양심은 적의 편이다는 인식이 확고했다.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페다고지> 백기완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전환시대의 논리>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읽었다.

 

책과 관련해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하루는 송원근이라고 광주일고 나온 친구가 나를 불렀다.

 "친구야 이거 아들본이다." 하며 은밀히 내게 몇 권의 책자를 건넸다.

일반적으로 출판된 책자가 아니라 일일이 타자로 한자 한자 찍은 유인물 책이었다.

<공산당선언>이 실린 마르크스 엥겔스 원전들부터 스탈린 저작집, 모택동 저작집이 다 포함돼있었다.

그때만 해도 불온서적이었다. 내가 데모하고 다니는데 그 친구는 자기는 데모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 미안한 마음을 담아내게 주었다.

독일어를 번역해서 자기가 직접 타자로 타이핑해서 7권을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그 친구가 내게 건넨 그 7권이 지금도 집에 그대로 남아있다. 가지고 있었던 다른 이념서적은 다 태웠어도 그 자료집은 태우지 않았다.

책에 실린 내용보다 그 친구의 정성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그 무렵 나는 또 모택동에게 굉장히 영향을 받았따. 중국 공산당의 혁명운동은 인민대중이 갖는 변혁에 대한 에너지를 잘 조직화했다.

자본주의의 구조주의 모순의 결과물이라고 봤던 레닌주의와 달리 마오는 중국 현실에 맞지 않는

레닌주의에 기대기보다는 근로대중의 욕구, 진화와 발전이라는 인간의 종의 속성에 맞는 혁명이론에 충실하게 여겨졌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해가는 인간의 모습... 그때 마오사상 중에 가장 많이 읽었던 것이 <모순론>과 <실천론>이었다.

마오의 초기저작에 보면 중국사회의 계급분석을 해놓았는데, 레닌주의의 분석틀로만 보지 않고

당시 중국사회 계급을 다양한 계층으로 쪼개어놓고 각기 혁명적 열정과 에너지가 어떻게 다른가를 규명해놓았는데

그게 참 재미있었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내가 수세싸움 할 때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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